브룩스 브라더스는
미국의
아이콘이며,
우리는 아래와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가장 오래된 의류
테일러인
브룩스 브라더스
는
거의 200년에 가까운
오랜시간 동안
같은 전통과
가치관을 지켜
왔다는 것에
대해
큰 자랑스러움을 느낍
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까지
단순한 스토어가
아닌
하나의 가치로서
고객에게
사랑 받아 온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200
yearsof BROOKS
BROTHERS
브룩스 브라더스에서 처음으로 수출된 아이템은 스코틀랜드의 아우터로 헤브리디스 제도에 있는 작은 시설에서 방직된 해리스 트위드를 사용한 제품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해리스 트위드는 방직공의 집에서 만들어지며 장인들에 의해 전사처리 됩니다. 더블 브레스티드 디자인에 라쿤 칼라를 사용한 이 제품은 베스트 셀러 제품이었습니다.
쓰리-버튼 재킷의 유행이 지나가고, 투-버튼 재킷을 살 여유가 없었던 대학생들은 오래된 자켓의 라펠에 변화를 주기 시작합니다.
브룩스 브라더스는 이런 트렌드를 적용시켜 “The Number One” 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라인을 출시합니다. 새로운 재단법과 내추럴 숄더, 기능이 없는 세번째 버튼 등 새로운 모습인 The Number One 라인의 “Sack” 제품은 20세기의 최초 50년 동안 미국 의류 사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브룩스 브라더스는 이 당시 처음으로 화려한 인디언 페브릭을 따뜻한 계절의 레저웨어에 사용한 룩을 미국 고객에게 제안합니다.
이미 영국군의 타이로 잘 알려져 있던 타이의 스트라이프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모든 이들이 착용할 수 있는 Repp Tie가 탄생됩니다.
사업 운영 95년 이후, 브룩스 브라더스는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고객들이 많이 발생하자 다른 도시에서도 트렁크 쇼를 진행하기 위해 다양한 파트의 전문 이력을 파견합니다.
브룩스는 비 오는 날의 양배추 끓이는 냄새로 유명한 셔틀랜드 제도의 개인 가정에서 제작된 전통적인 스웨터를 미국으로 가져옵니다.
1938년 다양한 컬러를 도입하면서 이 스웨터는 여대생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고 브룩스가 여성 의류 사업에 뛰어드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브룩스의 대표 프란시스 G. 로이드는 영국 부유층이 즐겨 하던 프린팅 실크 타이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가 이러한 패브릭을 미국에 들여온 순간 남성들에게 없어서 못 파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매디슨 애비뉴 스토어에서 운영되던 가게가 2차 세계 대전의 피해로 제작소가 공습받게 되어 프린팅 타이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서 한정 수량으로만 판매하는 제품으로 소문이 나 적은 수량이 빠르게 동이 나게 됩니다.
“브룩스 브라더스는 맨하탄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 진출하는 첫 스텝으로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 계절 한정 지점을 오픈하게 됩니다.
이 곳의 판매자는 뉴욕으로 여행오지 못하는 고객을 위한 첫 번째 응급 처지였습니다.”
원래 잉글리쉬 폴로 코트는 카멜헤어 오버코트로 20세기 초반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스미스나 래드클리프 등의 여대생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더블-브레스티드 디자인의 여성 코트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15년 여름,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이 완공되며 브룩스브라더스는 현재 10층 규모의 본점이 있는 메디슨 에비뉴 346번지로 이전하게 됩니다. 하버드 대학이나 예일대학 클럽, 뉴욕 요트클럽 등 당시 뉴욕에서 가장 저명한 단체들이 선호하는 지역 인근에 위치하게되었고, 주변에서는 브룩스브라더스의 이전을 환영하였습니다.
설립자 핸리 샌즈 브룩스의 4대인 윈스럽 홀리 브룩스는 와이오밍의 목장을 사, 프린스턴 졸업생인 어빙 H. 라롬과 함께 파트너십을 맺습니다. 윈스럽이 1935년 브룩스의 대표가 되면서 목장을 떠나게 되었고, 회사는 1968년까지 밸리 랜치를 운영하는데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미국이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브룩스브라더스는 즉시 군복을 공급하고, 전투 현장과 병영에 필요한 다양한 비품을 제작하여 해외에 주둔중인 군대에 공급하였습니다. 1918년 4월 이후 걸린 붉은 테의 백기가 보여주듯이, 이들 중 일부는 브룩스브라더스의 직원들이었습니다.
재즈 시대의 전성기동안 패션 아이콘이었던 스캇 피츠제랄드는 버튼 다운 칼라 셔츠 등 브룩스브라더스의 여러 제품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역사적인 대서양 횡단에서,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는 여분의 갈아 입을 옷을 적재할 수화물 공간이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대서양 횡단 비행을 마치면서 프랑스로 향하던 미국 대사에게 브룩스브라더스의 정장을 빌려입게 됩니다.
뉴욕 증권 시장 대폭락 시점부터 대공황 기간 내내, 브룩스브라더스는 융자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매업체였습니다.
브룩스 브라더스는 영국에서 1920년대에 시어서커를 도입, 10년 후 브룩스의 브라더스의 시그니처 수트 패턴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작은 브로슈어에 시어서커로 만들어진 ‘Palm Beach’ 수트가 소개되면서 많은 수요가 발생하게 됩니다.
브룩스 브라더스의 자선 활동은 오랜 기간 동안 회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브룩스는 미국 적십사자의 서포터였으며, 오늘날 이 전통은 이어져 세인트 쥬드 아동 병원을 포함, 다양한 기관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윈스롭 홀리 브룩스는 위싱턴 D.C에 있는 줄리어스 가핀클 (Julius Garfinckel)사에 128년 전 설립된 자신의 고조부의 회사를 매각하였습니다. 존 C. 우드(John C. Wood)가 기업의 대표로 지명되고, 20년 이상 그 자리에 머무릅니다. 타임지로부터 그의 은퇴 시점에 회사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윈스롭 브룩스는 “더 브룩스답게 만들었죠.”라고 간단히 대답하였습니다.
브룩스 브라더스 브루클린에 의류 공장을 오픈하다
브룩스 브라더스는 브루클린에 의류 공장을 오픈하였으며,남성 셔츠 생산을 위해 뉴저지의 패터슨의 페어 스트리트에도 오픈합니다.
브룩스브라더스를 그대로 본 딴 디자인으로 시작한 경쟁 기업, 브룩스 의상(Brooks Clothing)에 브룩스 브라더스가 제소한 민사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피츠제랄드의 낙원의 이쪽(This Side of Paradise)이라는 작품이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피츠제랄드의 작품은 “브룩스”하면, 브룩스브라더스를 떠올리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를 통틀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인 게이블 (Gable)은, 브룩스 브라더스의 맞춤 수트를 원했는데 이것은 기존의 기성복은 그의 신체에 맞지 않기 떄문이였습니다. (Chest 44inch/Waist 32inch)
다행히도 브룩스의 기성 옥스포드의 셔츠는 그에게 잘 맞았고, 그는 매우 많은 셔츠를 구매해 갑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여성들이 활동적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1949년 보그지(Vogue)에서는 브룩스브라더스 남성복 라인의 핑크색 버튼 다운 셔츠를 입은 여성 모델의 사진이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브룩스브라더즈에는 여성복 컬렉션이 등장하게 됩니다.
존 F. 케네디 상원은 브룩스브라더스 정장을 입고 재클린 리 부비에(Jacqueline Lee Bouvier)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신랑의 들러리는 미래의 대통령으로부터 유행을 타지 않는 값진 선물로 브룩스브라더스 우산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케네디는 임기 동안 활기 넘치는 그를 잘 표현해내는 패셔너블한 실루엣을 지닌 브룩스브라더스의 “넘버 2” 투 버튼 정장을 즐겨 착용하였습니다.
당시 브룩스브라더스의 대표였던 존 클라우드가 어느 골퍼의 인상적인 무늬가 새겨진 핸드 메이드 양말을 본 것이 브룩스 브라더스와 아가일 무늬와의 첫 만남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무늬를 보고 미국의 의류 소매 업체 중에서는 처음으로 아가일 모양의 긴 양말을 제조하게 됩니다.
브룩스이즈(BrooksEase) 정장이 미국에 첫 선을 보였습니다. 스웨덴에서 자동차 덮개용으로 개발한 고급 직조 기법을 사용하여 이 우스티드 순모를 양방향으로 신축성을 지니게 만들어낸 제품으로 브룩스브라더스의 대표였던 존 C. 우드는 완벽한 여행용 정장의 기본 섬유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20세기의 대부분 동안, 브룩스 브라더스는 로드 웰링턴, 윈스턴 처칠, 그리고 프레드 아스테어까지 모두가 즐겨 신던 런던의 신발 제조사 펄앤컴퍼니 (Peal & Company) 와 함께 독점 수입 계약을 합니다. 1965년 브룩스는 회사의 구두틀, 패턴, 이름을 구매합니다.필을 좋아하는 유명인 중 하나는 권투선수 잭 뎀프시 (Jack Dempsey)였는데, 그는 그의 긴 다리와 가느다란 발을 위한 수제화를 즐겨 신었다고 합니다.
브룩스브라더스의 오랜 고객이었던 닉슨 전 대통령은 아이러니 하게도 엔트리 라인이였던 브룩스게이트의 오랜 팬이었습니다. 1976년 새롭게 소개된 브룩스게이트 라인은 몸에 잘 맞는 젊은 스타일로 패션에 민감한 젊은 세대에게 강하게 어필되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74년 브로드웨이와 본드 스트리트로 가게가 다시 옮겨지면서 여성 의류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나, 1970년대 중반 처음으로 여성 컬렉션 풀-스케일의 여성 의류를 다루는 부서가 생기게 됩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브랜드 브룩스브라더스는 일본에서 첫 인터내셔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 하게 됩니다. 1979년에 아오야마에 오픈한 플래그십 스토어는 아메리칸 클래식 스타일이 일본 전역으로 펼쳐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일본 전역에 75개 이상의 브룩스브라더스 스토어가 운영 중입니다.
리사 번바흐(Lisa Birnbach)의 공식 프레피룩 가이드북(Official PREPPY Handbook)이 출판 된 후, 뉴욕 타임즈 베스트 셀러 목록에서 38주간 정상을 차지합니다. 책을 통해 공인된 스토어 목록에서 브룩스브라더스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프레피 룩 스토어 순위에 오르게 되었고, 책의 용어 사전 부분에서는 초성에 B가 두 개 오기 때문에 브룩스브라더스 브랜드를 B²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1980년 노스 캐롤라이나 갈랜드(Garland, North Carolina)에 브룩스브라더스의 셔츠 공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공장은 브룩스브라더스가 판매하는 레귤러 피니쉬의 셔츠 생산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게 됩니다 . 브룩스브라더스의 트위터 팔로워들이라면, 사진에서 2012년 3월 갈랜드 공장을 방문할 때 트윗한 욜란다(Yolanda Juanchi)의 미소 짓는 얼굴이 익숙하실 겁니다.
칼튼 월터스의 얘기에 따르면 앤디 워홀은 자신의 첫 번째 수표를 브룩스 넘버 10, 또는 화이트 버튼 다운 셔츠로 알려진 브룩스브라더스의 대표 제품에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윌터스는 “앤디 워홀을 상당히 잘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항상 후줄근해 보이고, 제대로 맬 시간이 없는 듯 타이는 항상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며 신발끈도 절대 똑바로 매어있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짝 양말을 신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앤디 워홀은 그의 옷을 모두 브룩스브라더스에서 구매하였습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브룩스 브라더스는 브룩스이즈(Brooksease) 셔츠를 런칭, 독특한 트레블 셔츠로 자리 매김합니다. 이 셔츠는 최초의 100% 코튼으로 만들어진 논-아이론 셔츠로, 여태까지의 데크론(dacron)과 다른 최초의 의류로 사랑받았던 브룩스의 1953년 셔츠를 좀 더 업그레이드한 셔츠였습니다.
브룩스 브라더스는 brooksbrother.com을 오픈하여 인터넷 영역으로 사업을 넓힙니다. 회사 내부의 뉴스레터 이름을 ‘@Brooks.co’으로 변경하였다가, 2003년 다시 ‘The Golden Fleece’로 변경합니다.